빛이 스며든다. 창으로, 커튼을 비집고, 블라인드 틈새로, 손가락 사이로, 벽 너머로, 나뭇잎 위를 출렁이며··· 정고요나의 회화는 아주 사적인 순간들에 계속 빛을 비춘다. 마시다 만 음료, 다이어리 등이 올려져 있는 창가, 그림자만이 아른거리는 나무 선반, 헝클어진 옷가지가 올려져 있는 침대와 같은 누군가의 흔적. 식물, 꽃 등 분명 누군가의 손길이 닿았을 비인간적 존재. 또, 방 안에서 혼자 셔츠만 걸친 채 바닥을 응시하며 무릎을 감싸고 앉아있거나, 수영장의 일렁거리는 물 위에 누워, 장소를 가늠하기 어려운 회색 콘크리트 벽으로 둘러쌓인 공간에 서서, 혹은 우뚝 솟은 산봉우리들 사이 저 멀리 하늘을 올려다보며 다양한 시간과 공간 속에서 사색에 잠긴 듯한 여러 인물들까지. 이러한 지극히 개인적인 순간들은 작가가 SNS에 업로드 된 이미지들을 회화의 소재로 차용하고 변용한 것이다.
'리얼 라이브 페인팅(Real Live Painting)' 등의 작업을 통해 회화에 설치, 퍼포먼스 등의 다양한 장르를 끌어들이며 자신만의 작업 방식을 계속 확장시키고 있는 정고요나는 이번 개인전 ≪아주 사적인 절차 In my algorithm≫에서 회화에 다시 집중한다. 이번 개인전에서 선보이는 00개의 회화 작업들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가 말했던 ‘푼크툼’이라는 현상이 떠오른다. 푼크툼[1]은 한 사람이 어떤 사진 이미지를 바라볼 때 그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마치 가슴을 찌르는 듯한 강렬한 느낌을 받는 것을 뜻한다. 미술비평가 김주옥 역시 정고요나의 회화에 대해 ‘푼크툼’을 언급한 바 있는데, 바로 정고요나의 회화가 그런 지극히 주관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2] 마치 회화 속 인물이나 인물이 남긴 사소한 그러나 소중한 흔적들을 통해 즉각적으로 거대한 친밀감이 형성되는 것 같다.
그러나 이는 단순히 타인의 사적인 순간을 회화의 소재로 차용했기에 그런 것은 아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정고요나는 SNS이미지 속 타인의 기억, 감정, 경험을 회화로 ‘번역’한다. 감정사회학자 김신식은 ‘감정 번역’이란 정확한 언어로 정답의 감정을 맞춰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자신 주변에 존재하는 대상, 그리고 자신과 대상을 둘러싼 세계가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한 고민이라고 설명한다. [3] 즉, 정고요나의 회화는 자신과 주변 세계를 헤아리고자 하는 시도인 것이다.
정고요나는 감정 번역을 위해, SNS 알고리즘이라는 멈추지 않는 눈을 뜬 채, 유령—SNS이미지—들을 회화로 꽂아버린다. 작가이자 시인인 제시 달링(Jesse Darling)은 SNS 이미지가 계속 다른 시간대에서 출몰하게 되는 ‘유령’이라고 칭하는데, 여기서 ‘유령’이란 여러 시공간으로 분산되는 몸을 갖는 것을 뜻한다. 달링은 스크린을 통해 보게 되는 이미지 속 실제 시공간은 ‘유령’으로서 사실상 보는 이에게는 접근이 불가능한 일종의 갈망만이 남아있는 장소라고 말한다.[4] 몇 초 후 스크린을 쓸어 넘기면 이내 사라져버릴 SNS 이미지는 유령 혹은 좀비처럼 온라인 공간을 떠다니며 남아있는 갈망만을 또다른 누군가에게 전달한다. 정고요나는 이러한 온라인 세상 어딘가에서 계속 부유하고 출몰하며 끊임없는 시차를 발생시키는 유령, 즉 SNS이미지를 회화로서 붙잡는다. 작가는 그리는 과정에서, 예를 들어 빛을 제외한 모든 장소성을 삭제하거나 빛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실제 시공간을 주관적으로 변형시키고, 유화물감으로 천천히 채색하가는 과정에서 시간을 붙잡고 쌓아나가며 두께를 만든다. 손가락으로 터치함에도 접근할 수 없던 시공간을 물감들의 층으로 붙여나가며 촉각적 감각을 형성하는 것이다. 이렇게 회화로 꽂힌 사적인 순간들은 더 촉각적이며 더 친밀하다.
한편, 작가 자신의 이미지도 이러한 친밀감에 기여한다. < 네 시 >는 자화상으로, 작가 자신이 한창 작업 중인 듯한 책상 앞에 앉아 뼈마디가 훤히 들여다보이는 손등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고, 그 뒤로는 창문과 나뭇가지가 햇빛에 비춰 그림자를 드리운다. 작가 자신을 감싸던 손은
에서 대상과 교감하는 손짓으로 변화하고, 내부를 향한 시선은 < 아름다운 9월 >에서 외부를 향한 시선으로 바뀐다. 결국, 정고요나의 친밀한 회화는 작가 자신에게 있어 내부와 외부를 모두 돌아보게 하는 통로가 된다.
정고요나의 이번 개인전 제목인 “아주 사적인 절차”는 두 가지 의미를 담는다. 아주 사적인 절차節次—일을 치르는 데 거쳐야 하는 순서나 방법—로 SNS알고리즘을 이용해 타인의 개인적인 순간들을 회화로 가공하는 작가의 작업 방식을 뜻하기도 하고, 아주 사적인 절차切磋—옥이나 돌을 갈고 닦는다는 뜻으로 학문과 덕행을 닦음을 이르는 말—로 작업을 통한 감정 번역, 다시말해 작가의 작가 자신과 주변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끊임없는 시도를 뜻하기도 한다.[5] 작가는 SNS이미지를 소재로 한 친밀한 회화를 통해 자신과 대상이 속해있는 세상과 소통하는 방식—프로토콜(protocol)—을 구축해나가고 있다.
[1] 참조, Roland Barthes, Camera Lucida: Reflections on Photography (New York: Hill and Wang, 1981).
[2] 참조, 김주옥, 『한국의 동시대작가들이 가상을 이해하는 방식』, 출판사, 년도, 페이지 pp.
[3] 김신식, 『다소 곤란한 감정』, 출판사, 년도, 페이지 pp.
[4] Jesse Darling, “Intimacy Keynote,” Google Doc, June 2, 2015, https://docs.google.com/document/d/1LfaD6Zas5vhitkbzhLdSmyYj6pulwYjsfczOgO0FnFw/edit.
[5] ‘절차’의 사전적 의미에 대해 네이버 국어사전을 참조했다. https://ko.dict.naver.com/.